[재충전]한 번 가보자 유럽 : 베네치아에서 파리까지

정록
2018-05-24

조금은 뜬금없이 유럽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행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경험과 기운을 불어넣기에는 다른 시공간으로 나를 던져놓는 여행만큼 효율적인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것저것 계획을 세우다보니 어느새 예산은 초과되기 시작했고, 일단 다녀와서 굶자는 생각을 할 즈음, 인권활동가 재충전 프로젝트 <일단, 쉬고>를 알게 됐다. 재충전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되는 법이니, 알아서 계획을 세워오면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취지가 어찌나 고마웠던지. 그렇게 나의 베네치아-파리 유람은 시작됐다. 


베네치아, 어드벤처 테마파크


아주 오래 전부터 대표적인 관광지였다는 베네치아에 대해 내가 들은 최근 뉴스는 너무나 많은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서 주민들이 시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왠지 그리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난 바로 그 대표적인 관광지를 찾아 날아온 한국인 관광객인 것을. 도착 당일, 베네치아 본섬으로 들어가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에서 보이는 베네치아의 모습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디즈니랜드와 같은 거대 놀이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6~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베네치아가 그런 판타지 이미지의 원형이 아닐까 싶었다. 바다 위에 건설한 거대한 인공구조물들, 그 곳에서 몇 개월동안 이어지는 각종 카니발, 한 몫 잡기를 바라는 상인과 선원들의 도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어드벤처 테마파크의 실사판이 이런 게 아닐까?


환영받지 못하는 관광객이라는 걱정은 베네치아에 도착한 순간 사라졌다. 놀이공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관람객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모두 베네치아에 모인 것 같았다. 다들 신기한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사진찍기 바빴다. 석호 위에 건설된 도시이다보니 차가 다닐 수 없고, 오로지 좁은 골목길과 수로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로 끝없이 이어졌다. 배를 타거나 오로지 두 발로만 걸어다녀야 하는 곳. 흥에 겨워 걷는 내 옆으로 청소노동자들이 폐기물 수레를 힘겹게 끌고 한 계단씩 다리를 힘겹게 올라선다. 


리알토 다리에서 본 베네치아 대운하


베네치아는 중세때부터 예루살렘 성지순례 풀 패키지 관광상품으로 돈을 벌던 곳이라고 한다. 종교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찾아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기독교-이슬람 문명 사이에서 중개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이를 독점하기 위해 천 년 동안 수많은 전쟁을 벌이며 국가를 지켰다고 한다. 거대한 성당들을 보다보면 인간의 종교적 신념과 열정에 질리게 된다. 당시 사람들을 이해하긴 쉽지 않다는 체념과 함께. 그런데 베네치아는 자본주의의 오래된 미래였다. 누군가 역사는 반복이라고 했던가.


파리, 혁명의 흔적을 찾아서


베네치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알프스를 넘으니 1시간 40분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열차를 타고 숙소가 위치한 파리 북 역에 내렸다. 파리에 처음 발딛고 내뱉은 말은 "응? 이스탄불이랑 똑같은데?"였다. 좁은 도로, 신호등 정도는 무시하는 사람들, 결정적으로 백인이 보이지 않는 거리풍경은 내 머릿속 파리와 너무 달랐다. 아랍, 인도, 아프리카계 프랑스인들의 밀집 주거지역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서 있는 아시안으로서 내 모습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파리에도 소매치기가 많다더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참,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하다. 


꽁시에르주리 프랑스 인권선언문 앞에서 /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빅토르 누아르의 묘


파리 관광은 박물관 관람과 프랑스 혁명 유적 답사가 목표였다. 첫번째 목표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다닌 덕분에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흔적은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대혁명기 감옥으로 사용했다는 꽁시에리쥬리는 혁명보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물이 더 눈에 띄었고, 1830년과 48년 혁명은 바스티유 광장 기념탑에서 71년 파리 꼬뮌은 페르 라셰즈 묘지의 '꼬뮌 전사들의 벽'에 겨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100여 년 동안 이어진 혁명이 남긴 폭력의 상처가 프랑스에 남아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꼬뮌 전사들의 벽'을 보기 위해 방문한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이들이 너무 많이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꼬뮌 전사들의 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인터내셔널가' 작곡가인 외젠 포티에, 1870년 시위 도중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해 파리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모았던 빅토르 누아르의 묘지가 더 기억에 남는다. 꼬뮌 전사들의 시체가 둥둥 떠있었지만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서 썩는 냄새가 지독했다던 뷔트 쇼몽 공원은 이제 파리 시민들의 평화로운 일광욕 장소가 되어 있었다. 역사란 결국 과거의 사건들을 어떻게 남기고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싼 싸움이라는 생각이 파리를 걷는 동안 떠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외면받을지라도 누군가는 기억해야 미래의 싸움이 가능하다. 

 

글 | 정록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의여행